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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심심치 않게 몇 가지 단어들이 언론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걸 보게 된다 : 혐오, féminicide 등등. 여성혐오와 같은 신조어가 생김과 동시에 언론은 여성들의 집단적인 추모열기를 이해하기 위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간다. 관련 기사를 검색할때마다 나타나는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도 사건 원인을 두고 전문가 견해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혐오 범죄에 무게를 뒀습니다. 특히 여성혐오가 범죄 원인일 것이라는 세인들의 인식에 주목했습니다.

이 교수는 "직접적인 혐오 범죄로 볼 순 없지만, 무의식에 각인된 혐오로 인한 범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진단했습니다.

"한 개인이 여성 혐오감을 느끼고 살인했는지보다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평가도 했습니다. 왜 여성혐오 범죄로 받아들이고서 이슈화했는지 그 맥락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는 "사회불만을 여성에게 표출한 성격도 있다.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에 의해 죽을 수 있다는 불안이 젊은 층에서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설명도 했습니다.> 


해당기사 :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2887483


사회학자이기 때문에 물론 한 사건이 가진 사회적 함의를 해석하는데 주력하는게 당연하겠으나, 기본적으로 이런 병리적(정신병리)적 사건의 경우에는 인식론적(épistémologique) 문제를 구분하는게 굉장히 중요해 보인다.


1. '직접적인 혐오 범죄로 볼 순 없지만, 무의식에 각인된 혐오로 인한 범죄로 볼 수 있다'


- 기본적으로 정신병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보인다. 살인을 저지른 피의자가 여성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었다면 피의자는 필연적으로 일반인 스펙트럼 안에 들어가야한다 .'의도성'과 '합리성'을 가진 일반인의 범주에서 살인사건을 바라보는것이다. 본인보다 연약한 여성을 화장실에서 기다려서 살해했다는 이유만으로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할것이라고 생각하나보다. 무의식에 각인된 혐오는 사회학자가 할 얘기도 아니고 전문분야도 아닌것 같아 보인다. 조현병 스펙트럼이든 정신병리 관련 된 문제이든, '일반인'과 비교하는 순간 사건의 본질은 흐려진다. 이럴땐 전문가 말을 듣게 차라리 낫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4차례 입원한 피의자 전력을 보면 의사 결정 능력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며 "여성혐오 범죄라기보다는 그냥 묻지마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습니다. 


병리적 문제가 정상성/비정상성의 범주를 넘어섰을 땐, 같은 말을 해도 의미가 다르다. 한 단어가 모든 이에게 꼭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건 아니니까. 피의자가 지칭하는 '여성'은 일반인들 생각하는 '여성'과 다르다는걸 이해하는게 굉장히 중요하다. (기표, 기의, signifiant, signifié 관련해서는 Saussure 언어학 일반 강의)


2. '한 개인이 여성 혐오감을 느끼고 살인했는지보다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가 더 중요하'


- 기울어진 권력구조, 남녀간의 성불평등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보는 젠더(genre)사회학은 언제나 흥미롭다. 강약과 높고 낮음의 비대칭구조는 인류역사상 항상 존재해왔다. 칼 맑스 신봉자가 아니더라도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이상이고 지향점일뿐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전체주의가 아닌이상.(그렇다고 statu quo를 받아들여야 하는건 물론 아니다.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여성이라는 다수의/다같이 소외된 그룹, 그들의 사회적 중요성/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회/경제적 인식 그리고 그 간극사이에서 발생할 고통을 분석하려는 점 또한 굉장히 흥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의 구호,(비단 여성이 아니라 어떤 집단의 구호이든) '여자라서 죽었다'와 같은 캐치프레이즈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점은 참 아쉽다. 의미론적(sémantique) 관점으로만 보더라도 살해된 '피해자'와 그 피해자에 투영된 '잠재적 피해자'는 엄연히 구분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정작 실질적 피해자는 목숨을 잃은 여성 당사자 뿐이다.  살해된 여성에게 투영된 두려움은 사회 부조리의 사슬을 끊기 위한 여성들의 집단행동이자 개인적, 구조적으로 겪어온 불합리의 합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러므로 많은 여성들이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추모하던 그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을 잃은 젊은 여성이 아닌 구조적 폭력에 나약할 수 밖에 없었던 잠재적 피해자 자신이겠지. 사건이 일어난 후 정작 살해당한 피해자에 관한 뒷얘기는 들을 수 없다. 사라진 이가 겪은 실제적 고통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정작 사라진자는 조용하고 남은 이들은 추모한다. 거울의 비친 불평등을 사라진 자를 통해 애도한다, 기본적으로 애도(deuil)는 타자(망자)에게 투영한/했던 리비도를 찾아오는 과정이기에. 

'사람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가 더 중요하다'면 페미니즘이든 무너진 남근상의 표상인 일베든 야누스의 얼굴일 뿐이겠지. 사회학자는 개인 또는 집단이 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받아들였는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하는 것 같다. 


포르투갈에선 사람이 죽으면 돈을주고 가족대신 울어줄 이를 찾는다, pleureuse(곡녀). 티벳에선 사라진 망자를 기리기 위해 망자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물레방아에 돌리고 물레방아가 대신 울어준다고 한다. 

티비 프로그램에 방청객이 있는 건 다른이유가 아니다. 시청자들도 방청객의 웃음을 듣고 따라 웃으니까(Charles R, douglaas라고 1950년대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티비 프로그램에 웃음소리를 인위적으로 삽입했다, Zizek이 자주 예를 들곤 한다) 기쁨도 슬픔도 무엇보다 사회적 의무이고 사회적 표현이다(Marcel Mauss, 1921). 

 

몇년 전부터 강남역 사건과 관련해 이나영 중앙대 교수의 인터뷰/칼럼을 보면서 잔다르크 생각이 났다. 잔다르크는 프랑스 구하겠다고 나섰다가 마지막에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다, 프랑스는 뭔지는 정확히 기억이 잘 안나지만 잉글랜드에 대항해 살아남았고. 근데  막상 잔다르크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얘기도 많다,  우연일까, 프랑스 극우는 잔다르크를  얘기한다, 강남역에는 추모의 열기만 남았다. 

 



관련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5131433001&code=940100

 


“we are imperfect mortal beings, aware of that mortality even as we push it away, failed by our very complication, so wired that when we mourn our losses we also mourn, for better or for worse, ourselves. as we were. as we are no longer. as we will one day not be at all.” 
 Joan Didion, The Year of Magical Thinking